나는 내 작은 운들을 가꿀 뿐
내 삶을 잘 꾸리려 할 때, 나는 내 몸과 내 주변을 잘 가꿀 힘과 책임이 있다. 아프지 않고 주중에 일을 해내려면 밥을 잘 챙겨먹고 땀도 내야 한다. 마음을 달래려면 부지런히 움직이고, 공부도 하고, 아름다운 것들도 눈과 귀에 담아야 한다.
헌데 날 챙기는 걸, “의지”라고 표현하고 싶진 않다. 여러 사람에 걸쳐 의지의 강약을 따지려면, 그 모든 사람들 마음이 똑같은 바탕이어야 할 테다. 헌데 사람 몸이 생겨먹은 건 제각기 다르다. 모두 균일균등한 영혼들인데 누구는 쌩쌩한 몸에 올라타고 또 누구는 병약한 몸에 서린 꼴이라면, 서로 다른 몸의 차이만큼만 조정해서 삶의 감각을 평가할 길도 있겠지만, 애초에 영혼이 몸에 서린 것을. 스스로 느끼는 힘이나 의지같은 감각은 내 몸과 내 주변, 날 감싸고 따르는 사건이나 상황에 따라 너무나도 다를 것이라 비교할 수 없다. 누구는 어느정도 힘들더라도 으쌰 하고 아침에 일어날 수 있겠지만, 다른 누구는 중력장이나 그물에 갇혀 미동조차 할 수 없다는 느낌으로 날이 밝을 때마다 괴로워할 수도 있을 테다. 그 둘은 서로가 느끼는 의지를 제 경험에 빗대어 추측만 해볼 수 있지, 감히 서로 그 감각을 맞대볼 수는 없을 테고, 비교한다해도 쓸모가 없다.
그럼 삶을 잘 가꾸려는 움직임과 마음이나 힘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생각했는데, 나는 고것들을 “내가 가꾸는 작은 운들”이라 일컫고 싶다. 내가 살 오늘과 내일을 텃밭처럼 두고, 거기에 내가 언젠가 거둘 운들을 심어두는 것이다. 미래 성공을 향한 경력 준비같은 플랜이 고 텃밭에 뉘이기엔 너무 기계적인 것이고, 이를테면 내일 일어나서 먹을 아침밥 재료를 미리 냉장고에 챙겨두는 일이 내가 말하는 운 가꾸기다. 울적할 때 랜덤으로 재생될 기분 좋은 노래를 목록에 일단 넣어두는 일도 그렇다. 사람을 만나 웃는 일도 그렇다. 내 몸과 내 뇌의 힘만큼 꽉 차있는 “의지력”의 한계를 보다가, 빈 틈이 보이면 조금 더 애써서 오늘 할 일을 해내는 일도 그렇다. 날이 계속 좋지 않으면 결실도 못 맺고 죽거나 썩을지도 모르지만, 무튼 운을 가꾸는 일은 그런 거다. 통약가능한 영혼이 일으켜내는 추상적인 힘으로서의 “의지”를 펼쳐내는 것도 아니고, 그저 가만히 생각지도 못 한 우연을 기다리는 것도 아니다. 그저 아주 미약하고 소소하게 씨를 뿌려둘 뿐이다.
삶을 아주 뒤집어버릴 만큼 땅과 하늘이 흔들릴 때도 있겠다. 그걸 나는 “대운”이라고 말하고 싶은데, 요건 내 힘이 닿지 않는 영역이고, 그저 받아들일 수만 있을 뿐이다. 요 며칠새 내가 아팠을 때도 나는 ‘대운이 바뀌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한동안 내가 어지럽고 방탕하게 생활해 이른 물리적 결과도 있지만, 동일 원인이 다른 삶에 적용된대도 동일 결과가 나오진 않았을 터이기에.) 아프긴 했는데, 지금은 잘 낫고 있고, 아프기 전부터 다짐하고 생각했던 삶가꾸기를 조금 더 확실히 앞당겨 실천하게 된 계기가 되어서, 결론적으로는 행복하다. (‘신이 왔다 간 것이 아닐까’ 하고 극적으로 오버해서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무튼 이러나저러나, 나는 내 작은 운을 가꿀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작은 운을 가꿀 수 있는 한, 가꿔야 할 책임도 있다. 내가 나와 내 주변을 돌볼 책임이나 한계, 그리고 내 주변 사람들을 챙길 수 있는 정도는, 내 운의 텃밭 크기 만큼이고, 그걸 나는 소중히 보살필 수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