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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은 있다(고 나는 생각하고 그게 비합리적이지 않다 생각한다)

  1. 나는 귀신이 있다 생각한다.
  2. 귀신이 있다 믿는 것이 비합리적이라 보는 사람들이 많다. 비과학적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3. 헌데 나는 귀신을 믿는 게 비과학적이라고는 해도 비합리적이라 생각진 않는다.
    1. 자연과학에는 귀신이 있다 말할 틈이 없어보인다.
    2. 자연과학은 합리적이다. 적어도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아무런 근거 없는 주장보다는 자연과학이 뒷받침하는 주장을 택할 테다. (딱 그런 의미에서 ‘합리적’이다.) 말이 되는 원리와 가설을 바탕으로 앞선 현상을 설명하고 앞으로 일어날 현상도 추측할 수 있기에.
    3. 그렇다고 자연과학에 거스르는 주장이 비합리적이라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자연과학을 하지 않으면서도 합리적일 수 있다. 혹은 실용적일 수 있다.
      1. 게다가 자연과학은 귀신이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질문에 예/아니오를 뽑아내는 거대한 대형 기계 같은 것이 아니다.
    4. 귀신을 믿는 게 비과학적이므로 비합리적이라는 주장은, 아마 이런 생각에서 나왔을 테다: <귀신의 존재를 보인다는 실험도 반복 가능한 결과를 보인 적이 없을 뿐더러, 귀신 때문에 일어났다 하는 현상도 파헤쳐 보면 ‘자연적인’ 현상일 뿐이다.>
    5. 혹은, <귀신이라는 존재 자체를 굳이 상정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귀신을 믿는 게 비합리적>이라 지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6. 하지만 자연과학 조차도 이런 질문을 던진다: “이러저러한 것이 있다고 봤을 때, 이러저러한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가? 그 설명이 말이 되는가? 아니면 적어도 이때까지 일어났던 일들과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일관성 있게 수용하면서 예측할 수 있는가?”
  4. 내가 그리는 귀신의 모습이 무엇인지에 따라 합리성이 판가름 날 수도 있을 테다. 귀신이 있고 없고는 문제가 아니고, 어떤 존재로서의 귀신을 말하느냐에 따라 내 귀신 이야기가 쓸모 있는지 없는지, 합리적인지 아닌지가 판가름 날 것이라는 말이다.
    1. 내가 말하는 ‘귀신’은 ‘컴퓨터 바이러스’와 같은 존재론적 층위에 있다.
      1. 컴퓨터 바이러스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물체 같은 모습으로 컴퓨터 내부를 떠돌아다니지 않는다. “컴퓨터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라고 진단할 때, 우리는 어떤 물체를 찾지 않는다.
      2. 안티바이러스 소프트웨어는 무엇을 검출하는가? 컴퓨터 프로그램이 평소에는 이러저러하게 작동할 거라 기대하는데, 이러저러한 걸 실행하고 나니 프로그램이 어찌저찌 특이하게 (잘못) 작동하네, 저장된 코드와 자료가 이러저러하게 바뀌어 있네, 하는 것을 검출한다. 바이러스의 일관된 증상을 보고 바이러스가 있다고 말한다.
    2. 가만히 방에 앉아 있는데 바람이 불고 문이 닫힐 때, “귀신이 있다”고 나는 말하기도 한다.
      1. 여기에 과학적인 설명을 덧붙이는 건 내 믿음과 직접 관련이 없다. 바람이 이러저러한 공기의 역학적 사실 때문에 불었던 것이고, 그로 인해 문이 닫혔다든지 하는 설명은 귀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다. 나는 그 설명을 납득하면서도 귀신의 존재를 주장할 수 있다.
      2. 그렇게 바람이 불고 문이 닫히는 일이 딱 한 번만 일어나고, 그 뒤부터는 전혀 그런 일이 없었다 치자. 그 때 내가 자연과학적 설명(가설)을 채택할지 귀신론을 채택할지는, 내가 이론을 채택해서 무엇을 해나갈지에 따라 달린 것이다. 이론 선택지 자체가 하나는 합리적이고 하나는 비합리적인 그런 상황이 아니다.
    3. “네가 귀신이라 생각했던 건 사실 이러저러하게 과학적으로 설명 가능한 자연적 현상일 뿐이야” 하는 말에, 나는 “이러저러하게 과학적으로도 설명되는 현상이 귀신의 움직임이다”하고도 말할 수 있다.
    4. 내가 귀신이 있다 믿는 것에 대해 합리적으로 문제를 제기할 방법은, “굳이 귀신을 믿어서 좋을 것이 무엇이냐” 하는 실용적 판단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 밖엔 없다. (ontological commitment의 문제다. 이 용어를 “존재론적 개입”이라고 옮긴 논문이 있던데, ‘개입’보다는 ‘확약’에 가깝다.) 이상하게도 글이 4.4에서 끝난다. 역시 귀신은 있어.

ontological commitment를 어찌 번역할까 싶다. 저번 포스팅에서 어찌 다르게 번역했었는데 뭐라 번역했는지 기억이. 혹시나 해서 일본은 어찌 번역하나 찾아봤더니 “존재론적 코밋또멘또” (…) 다만 어떤 포스팅은 “존재론적 카카와리(관계, 상관하는 바)”로 옮겼는데, 원어의 적당히 캐치하는 듯 하긴 하나 조금 애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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