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말이 없나?
2010-02-14 일요일 10:26 밤 제주도 할아버지 집, 깜깜한 방 벽에 기대어
“아무 말이나 좀 해봐.”
어색한 침묵을 참다못해 앞에 앉아있던 친구가 내게 말한다. 십분이 넘도록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생각으론 이런 저런 이야기가 있었고, 그 나름대로 내 머릿속에선 생각도 이어지고,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하지만, 정작 상대방은 내게 허무함을 토로한다.
“나만 말하잖아. 너도 좀 말해 보라고.”
나는 억울해 죽겠다. 그렇지만 정말로 지난 대화를 돌아보면 내가 하는 말이란 고작 ‘아, 그래?’ – 이것도 남은 부산 사투리 영향때문인지 무덤덤하고 대충인 느낌을 준다 – 라든지 ‘음’ 따위 감탄사뿐이다. 왜 나는 이렇게 말이 없을까? 친구 동혁이는 그냥 내 나름의 스타일이라며 괜찮다고 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끼치는 불편이 나의 걱정으로 이어진다.
내 마음 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건 나뿐이다. 그래서 내가 내 마음 속을 진찰해보았다.
말이 없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할 말이 없거나, 그저 말하지 않는 경우. 할 말이 없다는 건, 별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나는 평소 그저 생각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생각이 없다기 보단 내가 하는 생각이 다 거기서 거기라, 마땅히 다른 이들에게 재미있게 들려줄 거리가 없는 것이다. 언어와 구획, 젠더와 구성같은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어줄 사람이 얼마나 될까? 어제 어디를 갔는데, 뭘 보았고, 그것이 좋았다 등의 이야기도 내가 생각할 땐 뻔한 것이라서 말해보았자 재미있을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 할 말이 없다는 건 사실 내가 담고 있는 무언가를 말하지 않기 때문에 할 말이 없는 것이 아닌가? 좀비가 아닌 이상, 마음에 어떤 것을 품지 않은 사람은 없다. 목에 칼을 들이대고 말해보라 했을 때, 정말로 생각하는 것이 없어 아무 말도 못할 경우는 없을테다.
그런데 내가 품고 있는 소소한 이야기들이, 내게 보잘 것 없어보이는 그런 이야기들이, 정말로 가치 없는 잡소리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관점을 달리해서 보면, 나는 그런 소소한 이야기들을 꽤 재밌게 듣는다. 이런저런 크고 작은 경험을 이야기하는 상대방의 이야기에 이끌려, 나는 실제 그 당시의 상황을 상상해보기도 하고,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다니 부럽다’라든지 ‘나도 그런 일을 직접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해본다. 그러면서 나는 상대방의 나날에 얽힌 사건의 실을 뽑아내고, 그것을 내 안에서 새로이 엮어 그 사람 삶의 모사를 품는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자신이 없는 게, 상대방이 말하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내가 말하는 것은 아무래도 재미가 없다는 느낌이다. 말하는 내용의 차이일 수도 있고, 말하는 방식의 차이일 수도 있고. ‘말하는 내용의 차이가 어디 있는가? 상대방도 자신의 별 것 없는 경험을 말하고 있는데’ 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내 생활은 무미건조하며 단조롭기 짝이 없어서 이야기할 거리가 없다고 느끼기도 한다. 말하는 방식이란 태도나 음정 또는 높낮이 따위의 것들인데, 나는 항상 우물쭈물 낮게 깔린 목소리 – 무언가 귀찮은 듯이, 그리고 피곤한 듯이 – 로 무언가를 말하다 만다는 느낌을 말하고 난 한참 뒤에야 받는다. 일단 나는 말하는 태도 습관부터 고쳐보아야겠다고 생각해보는데, 생각하면 할 수록 그것이 곧 말하는 내용, 내용은 곧 내 삶 전체와도 연결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침체와 나태 – 내가 기르는 이 두 가지 나쁜 성질이, 내 생활은 물론 사람들과의 의사소통까지 파고들어 의미를 갉아먹고 있다는 그런 사실 말이다. 조금만 뭣하면 피곤해지고, 피곤하니까 침체되고, 계속 침체되어 있으니 더욱 나태해진다. 그 때문에 내 생활에는 꽃이 피지 않는다. 무언가 시끄럽게 날뛰고 움직여서 잡초의 씨앗이라도 시간의 지반에 떨어진다면야 볼 것이 있겠지만, 내가 보내는 나날은 불모지 같을 뿐이다. 나는 능동적이지 못하고 모든 것을 피하게 된다. 내가 많이 하는 말은 “귀찮다”는 것이다. 언젠가 초등학생 때 귀찮다는 말을 골똘히 생각하면서 그 어원을 생각해보았는데, 귀찮다는 건 귀치 않다, 귀치 않다는 건 귀하지 않다는 뜻이 아닌가 나름 추측해보았다. 그 추론의 의미를 난 이제서야 깨닫는다. 무엇이 귀하지 않을까? 시간이, 지나가는 것들이, 내 몸짓 하나하나, 마주치는 풍경이. 그래서 내 삶이. 내 삶에서 지나가는 모든 것들이 귀찮다는 건 아무 것도 귀하지 않다는 것이다. 귀하지 않다니 – 그러나 나는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 나의 일상이 하찮기에 말할 자신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는가? 그저 무기력해서 이것도 피하고 저것도 피하고 하면서 ‘귀찮다 귀찮다’ 말했는데, 그것이 은연중에 정말로 내 삶의 모든 것을 귀하지 않게 – 하찮게 – 만들어버리고 나를 황폐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그래서 나는 지금 이렇게 조금 절망적인 상태에 이르렀다. 하지만 내 삶은 아직 가꾸어지지는 않았을 뿐 불모지는 아닐 터. 나는 무언가 말하고 싶다. 그래서 그 전에 무언가를 해보고 싶다. 열심히. 이것저것. 일단 무엇이 되든 나는 씨앗이라도 뿌려보고 싶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내게 그랬듯 나도 다른 누군가에게 기억되는 풍경이 되고 싶다. 삶의 모사본을 마음에 남겨, 내가 누군가에게 간직될 수 있는 재밌는 존재가 되고 싶다.